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(문단 편집) ==== 응게마 치하의 인명 피해 ==== 응게마의 집권 11년 동안 나치의 [[유대인]] 강제 수용소에 비교되며 '[[https://economictimes.indiatimes.com/people/hitler-is-not-the-only-one-tyrant-leaders-around-the-world/francisco-macas-nguema/slideshow/55999095.cms|아프리카의 다하우]]', '아프리카의 [[아우슈비츠]]'라고 불리던 적도 기니에서는 기록적이라고 할 만한 끔찍한 인명 피해가 통계로 잡히게 되었다. 응게마의 집권 직후인 1969년에 31.9만 명이던 적도 기니의 인구는 응게마가 몰락한 1979년 기준으로 약 24.1% 정도가 감소한 24.2만 명에 불과하게 되었으며, 응게마의 집권 말기에는 국민들 중 무려 60%가 수감과 친척의 살해를 경험했다고 한다. 그리고 응게마가 집권한 단 11년 동안 적도 기니의 국민들 중 5만~8만 명이 죽고 1만 명이 실종되었으며, 10만~15만 명이 해외로 도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,[* 1978년 8월 망명한 적도 기니인들의 단체 ANRD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적도 기니의 국민 중 6만 명은 [[가봉]]에, 4만 명은 [[카메룬]]에, 1만 5천 명은 [[나이지리아]]에, 8천 명은 [[스페인]]에, 300명은 [[상투메 프린시페]]에 망명을 갔다고 한다.] 이 수치를 1969년자 적도 기니의 인구에 대입하면, 10년 동안 전국민의 15.6~25.1%가 살해당하고 3.1%가 실종되며 31.3~47% 정도가 해외로 도피한 셈이다. '''최소치로만 합해도 이전 인구의 절반, 최대치로는 무려 75%가 증발한 거나 다를 바 없는 셈.''' 더구나 이 기록들은 모두 '''어떠한 전란도 없는 순수 폭정만으로''' 이뤄낸 것이다. 그나마 다행히도 이는 10년 간의 누적 수치라 실제로는 이전 인구의 1/4이 줄었다. 참고로 그와 비교되던 폴 포트 시기의 [[캄보디아]]에서는 4년 동안 인구가 이전의 10% 정도가 감소했고 최소 25.3%의 국민들이 사망했다. 이 수치를 적도 기니의 수치와 비교하면, 응게마가 '아프리카의 폴 포트'라 불린 것은 허투루 말한 것이 전혀 아니었던 셈이었다.[* 다만 그런 응게마도 오늘날의 [[마다가스카르]] 지역에 존재했던 [[메리나 왕국]]의 [[라나발로나 1세]]의 대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는데, 라나발로나 1세는 단 6년 만에 영토 확장을 위한 내전으로 문자 그대로 '''인구를 절반으로 줄였다.'''] 그런데도 응게마는 망명을 간 국민들을 '이유없이 도망친 사람들'이라고 모욕했으며, 적도 기니가 파탄난 것을 스페인 제국주의와 가톨릭 때문이라고 우겼고, 당연히 자신의 모든 인권 탄압을 전면 부인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